브루스 커밍스 서문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미국인들이 이 전쟁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미국인 3만 5천 명을 포함해 400만 명 이상을 사망케 한 이 전쟁을 대개는 좋은 전쟁(제2차 세계 대전)과 나쁜 전쟁(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어 있는 이상한 전쟁(odd conflict)으로 기억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1988년 올림픽 개최국이자 승용차와 컴퓨터를 수출하는 현대화된 한국과 이 전쟁을 연결 짓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누가 한국전쟁을 안다고 말할 때, 그들이 아는 것은 대개 공식적인 이야기(official story)다. 공식 역사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단순하다 : 1950년 6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북한군이 무고하고 무방비 상태의 한국(남한)을 갑자기 공격했다. 트루먼행정부는 마치 “경찰국가처럼 행동하며(police action)”, 이미 남북을 갈라놓은 38선의 현상유지를 회복하기 위해 유엔의 집단안보체제를 발동했다.1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1950년 9월 말까지 인천상륙 작전을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 후 맥아더가 북진을 계속해 남북한을 통일하려 하자 곧 중국군이 “떼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악화됐다.

트루먼은 전쟁이 더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결국 1951년 4월 고집 센 야전사령관을 해임해야 했다. 곧 휴전 회담이 시작됐지만, 전쟁포로 교환과 같은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로 인해 회담이 지연되면서 전쟁은 1953년 7월까지 계속됐다.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났고, 한국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처럼 두 개의 국가로 다시 나뉘었다.

약 40년 전, I. F. 스톤은, 타키투스가 아르카나 임페리(arcana imperii)라고 부른, 제국과 그 통치 방식에 대한 탐구와 그 방법, 특히 피지배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것”을 찾는 방식으로 시종일관한 책을 통해 공식 역사 서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2

스톤은 국내의 “임시 선출직 점유자”(트루먼)가 해외의 “야심 찬 지방총독인 카이사르”(맥아더)와 맞붙은 전쟁을 묘사하며, 이 총독이 “야만인 무리를 무찌를 원거리 진군에 나서기 위해 지원됐던 군대를 일찌감치 수도 방향으로 돌려놓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거의 20년 동안 절판되었던『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는 지금 마치 아홉 번의 생을 가진 책처럼 부활해, 영리한 저자의 발밑에서 살금살금 다시 걸어 나와, 역사적 정치적 정통성을 자랑하는 학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3

스톤은 처음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한국전쟁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이 전쟁은 틀림없이 소련을 배후로 하며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침략의 대표적 사례라고 믿었다. 그러나 1950년~1951년 겨울 파리에서 그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관점에서 외국인의 시각으로 미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고(故)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White)는 ‘북경학(Pekingology)’을 가리켜 마치 두 마리의 거대한 고래가 바다 밑에서 싸우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때때로 고래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물을 뿜어내면 그것이 곧 중국 문제의 유일한 증거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4

미국 정치 역시 종종 이와 같다. 우리는 ‘워싱턴학(Washingtonology)’을 배워야 한다. 신문을 꼼꼼히 읽고, 주요 인물들의 부침을 살피고,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곳을 찾아나서야 한다. 스톤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미국식 사고방식(American thought)과 크게 어긋나, 우리의 정치, 역사, 인간 행동에 대한 관념을 침해하고 음모론을 불러일으킨다. 역사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사람들은 과거를 캐고, 은폐된 것을 들춰내고, 숨겨진 힘과 경향을 탐색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역사의 심연을 탐험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재를 낙관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지식을 너무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이 “잊힌 전쟁”이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스톤은 1951년 여러 출판사를 전전하는 동안 자신의 연구 업적에 대한 따뜻한 찬사와 함께 “너무 민감한 주제여서 감당하기 어렵다(too hot to handle)”는 말을 듣곤 했다. 이는 폭넓은 언론의 자유와 암묵적 자기 검열이 일상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는 책 출간을 포기해야 했지만,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레오 휴버먼(Leo Huberman)과 폴 스위지(Paul Sweezy)를 우연히 만나면서 마침내 1쇄를 찍을 수 있었다.

내가 처음『숨겨진 역사』를 접한 것은 대학원생 시절로 당시는 베트남 전쟁 중이었다. 당시 어느 교수는 이 책이 신뢰할 수도 없고 음모론에 빠져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읽었고, 스톤의 연구 방식이 다른 유명 학자들의 연구 방식과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실(truth)을 중시했고, 두려움을 몰랐으며, 당대 주요 문제들에 대한 침묵을 객관성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나는 I. F. 스톤이 정직한 탐구의 모범을 제시한 것으로 봤는데, 이는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며 특히 최근 미국이 아시아에서 벌이는 전쟁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숨겨진 역사』는 매우 진솔한 책으로서,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책 중 하나이다.

과거 메리 매카시(Mary McCarthy)는 릴리언 헬먼(Lillian Hellman)이 하는 모든 말, 심지어 “a, an, and the”까지 거짓말이라고 비방했다.5 스톤의 경우는 그 반대로, 그가 하는 모든 말, 심지어 “a, an, and the”까지 (그가 보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배웠을까? 대학원생이었던 내게 미국의 현대사와 정치에 대한 솔직한 탐구는, 스톤의 말을 빌리자면, 신문, 책, 공식 문서 등 기존 문헌을 주의 깊고 비판적으로 읽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처럼 보였다. (『숨겨진 역사』의 여러 장점 중에서 특히 이 책이 독서법에 대한 교과서라는 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대신 그의 연구 방법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책을 정독(精讀)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어려운 점은 다른 데 있다. 길들여진 지혜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혜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는 것도 어렵고, 권위에 맞서는 것도 어렵다. 가장 어려운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욕망은 인식을 방해하고 기억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국가와 정의를 사랑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스톤이 그를 동정적으로 묘사한 것(“미국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소박하고 품위 있는, 훌륭한 혈통의 표본”)은 옳았다. 해리 트루먼이 어떻게 공화당 우파의 전쟁 도발(스톤이 암시하는 바)이나 무방비 상태의 타국민에 대한 테러 폭격을 허용할 수 있었으며, 우리를 제3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몰고 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종종 직관을 무시한 채 우리의 지도자를 신뢰하려 한다. 그들이 높은 지위에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신뢰할 만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들의 이름이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나 커티스 르메이라(Curtis LeMay) 할지라도).6

권력자들에 대한 이런 맹목적 신뢰는 그들이 연루된 사건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어렵게 만들고 기억을 더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자유주의 체제 및 미국 국민들과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연마한 억압 능력(faculty of repression)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정말로, 현대 미국 사회에서 매우 놀랄만한 일은 언론을 통해 우연히 드러나는 비밀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탁월한 능력이다. 중요한 사실들이 드러나도, 맥락의 부재나 당대 사건들의 패턴을 찾아내려는 정치적 감각의 부재로 인해 그 사실들은 이내 대양 한 가운데로 표류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있고 외교 정책 상의 비밀도 매우 광범위하게 공개하도록 법으로 보장돼 있지만, 그렇게 발화되고 공개된 것들을 누군가 듣고 있기나 한지, 혹은 듣고 있다 하더라도 기억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스톤이 공식 기록에서 누락되고 왜곡된 것, 그리고 노골적인 거짓말을 발견해도, 응오 딘 지엠 암살과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시작되는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기록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통킹만 사건은 의회의 전쟁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7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 및 CIA와 관련된 일련의 폭로는 레이건 시절에 벌어진 비잔틴식 비밀 활동(Byzantine covert activities)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 비밀 활동은 니카라과 콘트라 전쟁부터 올리버 노스/윌리엄 케이시(Oliver North/William Casey)가 이란의 수상한 무기상들과 거래한 사건, 그리고 파나마의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Manuel Antonio Noriega) 장군이 주요 마약 밀매범으로 밝혀진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노리에가는 공교롭게도 오랫동안 CIA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서로 연결해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지 못함으로써, 이들 사건은 그저 쉬이 납득할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났다 잊히는 일과성 만행으로 기억될 뿐이다.8

스톤이 책에 쓴 한 예를 들어 보자. 얼핏 보면 작은 사건이다. 스톤에 따르면, 그리고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전 콩 음모(soybean conspiracy)가 있었다. 1951년 맥아더 청문회(MacArthur Hearings)에서 어느 상원의원이 애치슨에게 1950년 6월 콩 시장 매점 사건에 대해 들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애치슨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중국인 집단이 일정량의 콩을 사들여 가격을 통제하는 매우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애치슨은 누가 관여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고, ‘차이나 로비’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었는지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상원의원들은 새로운 질문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음모론에 대해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되므로, 이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스톤 한 사람 뿐이다.9

누군가 시카고 시장에 대량의 대두(大豆)를 매도해 가격을 떨어뜨려 놓고, 더 많은 양의 대두를 선물(先物)로 보유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중순에 시작된 이 투기는 6월 25일 일요일, 그 운명적인 일요일 직전 주말의 대량 매도를 노린 것이었다. 상품거래소(CEA)가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6월 30일까지 56명의 중국인이 7월에 보유한 대두의 양은 선물 미결제 계약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모두 ‘매수 포지션(on the long side)’에 있었다. 이는 가격 상승을 노린 투기였음을 의미한다(352쪽).

이 콩 매점 사기극의 배후자 명단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해 보이지만, 당시 I. F. 스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한 T. V. 쑹(Soong)의 동생이자 장제스의 매형인 T. L. 쑹을 정확하게 지목했다.10

또한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조 매카시(Joe McCarthy) 상원의원도 대두 투기로 이익을 얻었다. 드류 피어슨(Drew Pearson)은 일기에 “매카시는 중국 국민당이 한국전쟁 직전 콩 시장을 거의 독점했을 때 콩을 사들이고 있었다”고 적었다.11 스톤은 매카시가 1950년 후반에 “콩 시장에서 투기에 성공했다”고 말했다(349쪽).

콩 투기는 워싱턴의 공식 발표를 스톤이 정밀 분석한 뒤 제시한 수많은 반론들 중 하나였다. 사소해 보이는 콩 투기 문제는 한국전쟁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밝힐 단서였지만 간과됐다.12

이는 스톤이 “매우 이상하고 시시콜콜한 것(very queer detail)” “아귀가 맞지 않는 이상한 모양의 조각”이라고 표현한 것을 찾아내 공식 논리를 무너뜨리거나 대안 논리를 세우는 방법론의 훌륭한 예다. 이런 일을 스톤보다 더 잘 한 사람이 있었을까.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해설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기이한 한 조각의 증거(odd-shaped piece of evidence)’는 서울 주재 미국 대사관이 북한의 공격에 대해 본국에 보고하는 전문 원본이다. 이는 한국군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돼 미국 소식통에 의해 “부분적으로 확인된” 전문이었다. 스톤은 “한국군 정보 가운데 확인된 것이 무엇이고, 확인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런 다음 그는 <런던타임스>에서 서울 주재 영국대표부(British Mission)가 보낸 간략한 전문을 찾아냈다. 단지 “전투 발발(the outbreak of fighting)”만을 확인하는 전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부만 확인된 빈약한 정보가 유엔의 한국전 개입을 결정하는 근거가 됐다.

스톤은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지문(指紋)을 찾듯이 문서를 읽는다.13 반쪽짜리 진실과 왜곡된 정보를 샅샅이 훑어 뭔가를 찾아내고 싶은 독자라면 맥아더사령부가 중국의 전쟁 개입과 관련해 작성한 “기밀정보 뭉치(ragout)”(170~173쪽)를 참고할 수도 있다. 스톤은 이 정보를 남김없이 정밀하게 분석한다. 이는 그의 책에 실린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스톤이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도쿄 브리핑(Tokyo’s briefings)에서 조선인민군(KPA)이 유령처럼 사라졌다는(phantomlike ephemerality) 스톤의 묘사는 재기 발랄하고 정확하며 풍자적인 재치를 담고 있다. 맥아더가 두 달 후 인천상륙작전 이후 완전히 궤멸시켰다고 주장했던 인민군대는 “나사로(Lazarus)가 무덤에서 살아 나오듯” 부활했다.

맥아더사령부에 따르면, 1950년 크리스마스까지 “12일 동안 재편성된 조선인민군 11개 사단이 다시 나타났다.” 이에 스톤은 “김일성은 현대판 카드무스(Cadmus)처럼 보였다”고 썼다.14 그리고 맥아더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떼로 몰려오자 재빨리 후퇴했다.

스톤은 일련의 사건이 이상하다고 보고 “중국이 ‘침략’에 실패했다”고 썼고, 훗날 기밀에서 해제된 정보도 그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 중국군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장기간 교전한 일이 없어 영국 정보 소식통들은 이들의 기동을 “가짜 전쟁(phony war)”이라고 불렀다.

훗날 기밀 해제된 문서는 다른 여러 사건에 대해서도 스톤이 꼼꼼하고 폭넓게 주로 신문을 읽고 내린 판단을 뒷받침한다. 조선인민군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멸하지 않고 재편성돼, 처음에는 한반도 중부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나중에는 맥아더의 압록강 진격에 맞서 중한(中朝) 연합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에서 조선인민군은 중국해방군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 국무부는 이미 오래 전, 한국에서 심각한 전투가 발발하면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위한 비망록 초안을 미리 작성했다는 스톤의 주장도 사실로 확인됐다.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직접 작성한 비망록은, 그가 1950년 4월 트루먼행정부에 합류한 뒤 “신중하면서도 분명하게 맥아더의 대만 정책에 협력했다”는 스톤의 주장이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또 중국은 명백히 방어전략적 이유에서 참전했다는 스톤의 주장도 훗날 랜드연구소가 내린 결론을 통해 확인됐다.

또 전쟁 발발 후 소련은 신중함과 자제력을 견지했고, 그 지도자 스탈린은 (미군기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소련 공군 기지를 폭격한 것과 같은) 모욕을 계속 감내했다는 스톤의 주장도 옳았다.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부산 방어선에서 보인 “중국과 러시아의 자제력”이 “미국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는 스톤의 주장을 거듭 확인했다.

즉,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미국의 참패가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여 1950년 8월과 9월 대구와 부산 근교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인민군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전차, 비행기 및 중포를 김일성에게 제공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애치슨은 미군이 한반도에서 밀려날 경우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공언했고, 미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입증되었듯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막강한 상륙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맥아더 및 이상하고 이중적인(odd and duplicitous) 그의 정보국장 찰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 장군이 중국 대륙으로 전쟁을 확대하려는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투 전략과 전투 보고서를 조작했다는 스톤의 지적도 옳았다.15

북한 공산주의를 격퇴하려다 실패한 재앙적 시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라는 더 큰 물음 앞에서(작전문서 NSC81은 ‘롤백(격퇴)’를 촉구했다),16 스톤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문헌이 고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쉽고 편하게,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면죄부를 주고 맥아더만 비난하는 입장을 거부했다. 스톤은 “트루먼은 냉전의 종식 또는 냉전을 구체적 현실로 전환시킬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고 썼다.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진격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당시 외교의 거장 딘 애치슨(제임스 체이스(James Chace)는 최근 그를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이후 가장 위대한 국무장관”이라고 불렀다)에 대한 스톤의 묘사는 다른 어떤 표현보다도 탁월하다.

우리의 영국 친구들에게는 애치슨이 “외무장관의 이상형으로, 교양 있고, 품위 있고, 뛰어난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다면, 많은 미국인들에게 그는 교활한 위선자(subversive poseur)였다. 스톤은 “미국 공인에게 있어서 역사와 인간성에 대한 세련되고 동정적인 관점에 대한 의심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고 썼다. 이는 애치슨이 오랜 친구인 앨저 히스(Alger Hiss)를 원칙적으로 옹호하다 곧바로 매카시즘적 분노를 표출한 것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됐다.17

이어 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204쪽).

오직 심하게 뒤틀린 미국의 냉전적 시각에서만 애치슨은 그의 본래 모습과 다르게 즉, 파격적이고 거창한(barbarous and patronizing) 표현을 빌리자면, “계몽된 보수주의자”로 비춰질 수 있었다. ... 매카시즘이 만연했던 이 시대에, 전쟁 전 재무부 장관으로 워싱턴에 데뷔한 애치슨이 뉴딜(New Deal) 정책 지지자들로부터 “모건맨”, 월가의 트로이 목마, 거대 은행가들을 위한 내부의 돌격대(borer-from-within)라고 비난받았던 사실을 누가 기억이나 했을까?18

현재 애치슨을 현명한 전략가로 평가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매카시와 맥아더가 없었다면, 애치슨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새로운 정책을 찾아내기 25년 전에 벌써 중국과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구축했을 것이라는 식이다.19

애치슨에 대해서는 스톤의 평가가 훨씬 정확하다(203-204쪽).

공직자가 “정말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기는 어렵고, 알아낸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그를 둘러싼 환경의 압박이 그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애치슨이 오랫동안 해 온 말과 행동은 그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 대해 시종일관 적대적이었음을 말해준다. ... 애치슨은 국무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스톤은 또한 애치슨이 중국에 대한 입장을 180도 바꾼 시점이 ‘총력 외교’ 연설에 나설 때인 1950년 2월이었다고 정확히 짚었다. 이 연설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 68호(NSC-68)를 통해 미국이 냉전 정책으로 돌아서기 전에 미리 대중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스톤은 “중국 혁명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기 시작한 애치슨의 일련의 연설은, 미국이 최상의 정책에 필요한 비전과 용기가 부족한 가운데 최악의 정책으로 표류하기 시작했음을 웅변한다”며, 그가 제시한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를 분석한 미 국무부 백서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사뭇 난해한 것이었다”고 썼다.20

오늘날 미국인들에게 1950년대에 미국 국민들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들을 상기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스톤은 이미 당대에 그렇게 했다. 스톤은 1952년, 북한의 한 도시가 “젤리화된 가솔린 폭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공군 브리핑을 읽고 나서 대단한 용기를 발휘해 다음과 같이 썼다(179쪽).

“그 행간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인인 나로 하여금 그날 자행된 일에 대해 극도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 11월 8일 신의주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평화냐 도발이냐의 경쟁의 시작이었다. 너무도 무기력하게 자신들의 이름으로 그러한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허용했던 서방국 국민들은 끔찍한 보복의 위협에 시달렸다. 방화광들은 바로 그런 식으로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려 했다.”21

스톤은 이 전쟁이 한국 국민들에게 끼친 끔찍한 결과에 대해 연민을 담아 글을 쓴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미 공군이 북한의 도시와 마을에 엄청난 양의 네이팜탄과 기타 소이탄을 끝도 없이 쏟아 부어,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잊힌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전쟁([odd] conflict)’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음을 상기하면, 기억이 기억상실증과 교차하는 지금, 이 세상에서 ‘누가 제정신인가?’라고 묻게 된다.22

이 책은 또한 I. F. 스톤이 미스터리를 매우 좋아하고, 그의 탐구 본능은 훌륭한 탐정의 열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숨겨진 역사』는 좋은 역사책일 뿐만 아니라, 긴장과 놀라움, 쉬이 풀리지 않는 질문들,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 가득한 잘 쓰인 이야기책이기도 하다. 실제 인물과 사건을 허구적 문체로 엮어 훌륭한 소설의 속도감과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책은 시종일관 호기심을 자아내는 불확실성과 심오한 관찰로 어우러져 있다. 그는 조지 케난(George Kennan)이 1951년 시카고 대학에서 한 “통찰력 있고 세련된” 강의를 인용하며, 스페인-미국 전쟁(그리고 듀이가 마닐라에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필리핀으로 확대된 전쟁)에 대한 케난의 해설이 언젠가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345쪽) :

[케난이 밝힌 대로] 미국 정부의 행동은 전략적으로 요직에 배치된 워싱턴의 소수 인사가 매우 유용하고 은밀하게 꾸며진 음모에 주로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음모는 전쟁 히스테리 덕분에 면죄부로 용서받고 공적인 축복 비슷한 것을 받기도 한다.

한국전쟁의 도발 가능성, 또는 그런 공격에 대한 암묵적 합의에 대한 스톤의 주장이 입증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어떤 정직한 역사가도 이 문제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북한군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1949년 여름 내내 자행된 남한의 도발과 1950년 봄부터 중요해진, 대만 장제스 정권과 서울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스톤의 장점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범하는 오류와 우리에게 닥치는 불운을 신랄한 냉소 없이 파헤칠 수 있고, 지위가 높고 힘센 사람들과 맞설 용기와 애국심을 겸비한(실제로 그는 이를 의무로 여긴다),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는 감상적인 훈계에 의한 것이 아닌, 꼼꼼한 조사에 기반을 둔 이상주의를 견지한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지닌 낙관주의자이고, 어떤 경우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진실, 독립, 그리고 우상 파괴를 향한 불굴의 의지가 있으며, 그것은 그 자신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유주의자이며, 늘 균형과 유머 감각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는 놀라운 업적이다. 계몽주의의 이상을 온전히 구현한 그는 그 이상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 사이를 뚜벅뚜벅 걷고 있다.

그의 열린 마음은 그의 방법론, 즉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는 소크라테스식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또한 수많은 미해결 질문들을 품고 있는『숨겨진 역사』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스톤은 70대에 이르러서도 그리스어를 배우고 고대 철학자들의 저술을 섭렵하기 위한 여정에 나섰다.

질문을 멈추면 창의성이 고갈된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 훌륭한 역사가 너머에는 훌륭한 시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니체는 훌륭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드러나 지식으로 완성된 역사적 현상은, 그것을 인식한 이에게는 이미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현상 속에서 망상, 불의, 맹목적 열정을 인식했고, 세속적이고 점차 암울해지는 이 현상의 지평 전체를 인식했으며, 따라서 역사에 내재돼 있는 그 힘 또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힘은 그가 지식인인 한 그를 지배하지 못하지만, 그가 삶을 영위하는 한은 아마도 계속 그를 지배할 수도 있을 것이다.23

1

역자 주 : police action은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군사적 행동에 나서는 것을 뜻한다. 1883년 6월 12일 영국 화물선 니세로(SS Nisero)호 승무원 28명이 인도네시아의 자바로 가다 수마트라에 억류됐을 때, 당시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가 “politionele acties(경찰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영국군과 함께 군사작전을 벌인 것이 시초다. (영문 위키피디아 참조)

2

타키투스에 대한 언급은 프란츠 슈르만(Franz Schurmann)의 저서『세계 권력의 논리: 세계 정치의 기원, 흐름, 그리고 모순에 대한 탐구』(뉴욕, 판테온 북스, 1974)에서 따왔다. 이 명저는 I. F. 스톤의 방법론을 차용했지만, 이론적으로는 더 정교하다. 마치 숨겨진 역사처럼 금세 절판됐다.
역자 주 : 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로『연대기(Annales)』를 썼다. / 아르카나 임페리 : 타키투스의『연대기』에, 티베리우스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갈루스가 “아르카나 임페리(arcana imperii)를 간파하려 했다”는 대목이 있다. ‘권력의 비밀’ 혹은 ‘통치의 비밀’이라는 뜻을 지녀, 국사(國事)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관장하는 통치자의 절대적 권위 또는 특권과 유사한 개념으로 통한다.(곽차섭 부산대 사학과 교수「인문산책 : 아르카나 임페리」(<부산일보> 2016.11.3) 참조)

3

역자 주 : ‘아홉 번의 생’은 1968년 개봉한 영화 ‘아홉 번 사는 고양이(The Cat Has Nine Lives, 감독 울라 슈퇴클 Ula Stockl)’의 은유로, 스톤의 저서가 긴 생명력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였다.

4

역자 주 : 시어도어 해롤드 화이트(중국명 白修德, 1915.5.6~1986.5.15)는 미국의 정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로, 1940년대 <타임>지 기자로 중국을 취재하며 1942~43년 중국의 기근에 대해 최초로 보도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5

역자 주 : 메리 매카시(1912.6.21~1989.10.25)와 릴리언 헬먼(1905.6.20~1984.6.30) 모두 미국 시나리오 작가들.

6

역자 주 : 조셉 매카시는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재임 1947.1~1957.3)으로,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전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불러 일으켜 ‘매카시즘(McCarthyism)’의 발안자로 통한다. / 커티스 르메이는 미 공군 장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쿄 대공습’으로 일본을 초토화시켰고, 한국전쟁 때도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 전역에 폭탄을 퍼부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공군참모총장을 지내며 소련과 쿠바에 대한 핵공격을 주장하며 케네디 형제와 극심하게 대립했다. ‘전쟁광’이라는 표현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인물이다.

7

역자 주 :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가 1963년 11월 1일과 22일 2주 간격으로 살해되고, 부통령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본격적인 준비 단계에 들어갔고, 8개월 뒤 일어난 ‘통킹만(Tonkin Gulf) 사건(1964.8)’을 빌미로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북폭’)을 개시하면서 전쟁이 본격화됐다. 통킹만 사건은 1971년 ‘펜타곤 페이퍼’가 공개되면서 미국 측이 북베트남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난다. 리영희는 훗날 공개되는 ‘미 국방성 비밀문서’를 근거로, 미국은 통킹만 사건 발생 6개월 전인 1964년 2월 1일 ‘34알파 작전 계획(Operation 34A)’이라는 암호명 아래 북베트남에 대한 정교하교도 은밀한 군사작전을 개시했으며, 통킹만 사건 발생 이틀 전인 1964년 7월 30일 심야에 남베트남 주둔 미 해군 기습부대가 미 구축함대에서 출발해 통킹만에 침투, 이곳에 있는 북베트남령의 2개 섬 홍메와 홍게에 기습상륙했다고 밝혔다(『베트남전쟁 - 30년 베트남전쟁의 전개와 종결』65~66쪽).

8

역자 주 : 비잔틴 비밀 작전 : 비잔틴(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 간 전쟁(서기 603~628년) 시기, 비잔틴의 정예 요원 니케타스가 비밀 임무를 띠고 페르시아제국 동부 지역에 침투해 페르시아의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스파이 활동을 한 사실을 의미한다. M Aroha가 쓴 책『페르시아 제국 동부 지역에서 벌어진 비잔틴 제국의 비밀 작전 : 첩보, 전쟁, 그리고 정치적 음모를 다룬 흥미진진한 이야기(The Byzantine Empire's Covert Operations in the Persian Empire's Eastern Provinces: A gripping tale of espionage, warfare, and political intrigue)』이 있다. / 이란-콘트라 스캔들 : 미국 레이건행정부 후반기인 1986년, 미 CIA가 이란에 무기를 몰래 수출하고 벌어들인 자금으로 중미의 반미 국가 니카라과의 우익 반군 ‘콘트라(Contra)’를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 세계에 충격을 준 사건. 미 언론은 이 ‘더러운 거래’를 주도한 미 국가안보위원회(NSC) 소속 해병 중령 올리버 노스를 영웅으로 만들었고 레이건 정권은 위기를 모면했다. 노스는 2018년 미국총기협회(NRA) 회장이 됐다. / 윌리엄 케이시 : 미국 법률가로 레이건행정부 때인 1981년부터 1987년까지 CIA 국장을 지내면서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관여했다. / 마누엘 노리에가 : 파나마 군인으로 1966년부터 CIA를 위해 일했으며, 레이건에 이어 대통령이 되는 조지 부시(George H.W. Bush)가 CIA 국장이던 1970년대 후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과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을 겨냥한 CIA 공작을 도왔고, 1983년 군 최고사령관이 된 뒤 대통령 위에 군림하며 마약 사업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미국 법무부가 그를 마약 밀매 혐의로 기소하자 파나마 대통령 델바에가 노리에가를 해임했으나, 파나마 의회가 델바에를 축출하고 노리에가를 국가수반으로 추대했다. 노리에가는 1년 여 동안 대통령직을 유지하며 미국과 대립했지만, 부시 정권이 출범한 해인 1989년 12월 미국은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 정권을 전복시키고 노리에가를 체포해 미국으로 압송했다. 노리에가는 마이애미 연방법원에서 미국 내 코카인 밀거래와 공갈, 돈세탁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19년간 복역했지만 전쟁포로로 특별대우를 받았으며, 텔레비전과 편의시설을 갖춘 주택에서 형기를 마쳤다. 2007년 9월 출소했지만, 3년 뒤인 2010년 4월 프랑스로 송환돼 프랑스 은행을 통해 마약 자금을 세탁한 혐의 등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파리에서 복역했다. 2011년 12월 석방돼 고국으로 송환된 뒤 정적 살해죄 등으로 다시 영어의 몸이 됐고, 건강 악화로 1년 뒤 병원으로 옮겨진 뒤, 2017년 5월 가택연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노리에가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미국이 제3세계 약소국을 쥐락펴락하는 극단적 예시라 할 만하다. 그에 못지 않은 사례가 한국의 대통령들인 이승만과 박정희의 경우가 아닐까.

9

맥아더 청문회, 제3권, 2187쪽 ; <뉴욕타임스> 1951년 6월 9일 자. <뉴욕타임스>는 이 콩 매점 사건은 “미국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닥뜨렸다고 말하는 전쟁에 대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공식적인 의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뉴욕타임스> 1951.7.6). / 역자 주 : 상원 군사외교위원회가 소집한 ‘맥아더 청문회’는 1951년 5월 3일 시작돼 6월 27일까지 열렸으며, 극동 지역의 군사적 정세와 맥아더 장군의 소환을 둘러싼 정황에 대해 마샬(Marshall) 국방장관, 애치슨(Acheson) 국무장관, 미 합참(the Joint Chiefs of Staff) 관계자, 맥아더 등의 증언을 청취했다. 미 비밀해제 외교문서철(FRUS), 1951. Volume VII. Korea and China (in two parts) Part 1 참조.

10

스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밀 해제 정보는 중국사무국(Office of Chinese Affairs)의 4223번 사서함, 앤 B. 휠러(Anne B. Wheeler)가 A. G. 호프(A. G. Hope)에게 보낸 편지(1950.7.25), 호프가 매길(Magill)에게 보낸 편지(1950.8.1) 참조.

11

드류 피어슨(Drew Pearson)『일기, 1949–1959』, 타일러 아벨(Tyler Abell) 편집(뉴욕: 홀트, 라인하트 & 윈스턴(Holt, Rinehart & Winston), 1974), 250쪽.

12

나는[브루스 커밍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한국전쟁의 기원(Origins of the Korean War)』(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1989) 제2권에서 자세히 다뤘다.

13

역자 주 : 셜록 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동명의 추리 소설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

14

역자 주 : ‘도쿄 브리핑’에 대한 설명은 도쿄 주재 연합군사령부에서의 한국전 전황 브리핑으로, 이때 맥아더가 조선인민군의 움직임을 오판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 나사로는 성경 요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병든 거지. 죽은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7가지 기적 중 하나로 묘사됨. / 카드무스는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Thebes)를 창건하고 알파벳을 전했다는 페니키아 왕자.

15

훌륭한 기밀 해제 자료를 바탕으로 스톤의 많은 관찰을 뒷받침하는 최근 문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특히 로즈마리 푸트(Rosemary Foot)의 『잘못된 전쟁(The Wrong War)』(Cornell University Press, 1985), 피터 로웨(Peter Lowe)의『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White Plains, NY, Longman, 1986), 캘럼 맥도널드(Callum MacDonald)의『코리아 : 베트남 이전의 전쟁(Korea: The War Before Vietnam)』(Glencoe: The Free Press, 1987)을 참고할 만하다.

16

역자 주 : 롤백(rollback)은 국제정치에서 적대 세력 확장을 단지 봉쇄하는 것을 넘어, 공격적으로 위축시키려는 초강경 전략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및 종료 시점까지 미국은 소련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취했지만, 1940년대 말부터는 소련 공산주의를 ‘격퇴하는(rolling back)’ 고강도 반공전략을 구사했다. 한국전쟁은 그 결과물일 수 있다. 소련이 무리한 롤백정책을 구사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정반대의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윤석렬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지낸 김영호는 성신여대 교수 시절인 1997년 11월 <한국정치학회보>(제31집 제3호)에 게재한「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 스탈린의 롤백 이론(A Reinternation[Reinterpretation] of the Causes of the Korean War from the International Political Perspective : Stalin's Rollback Theory)」에서,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중국 공산 혁명으로 공산세력 팽창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략적 상황과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해 자신의 세계전략적 목적 달성을 위해 북한군으로 하여금 미국의 봉쇄선을 대담하게 넘게 해 한반도 전체를 소련 영향권에 편입시키려고 6.25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17

역자 주 : 제임스 체이스 : 미국 외교와 정치 전문 기록자로, 1998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전기 『애치슨 : 미국이라는 세계를 창조한 국무장관(Acheson : The Secretary of State Who Created the American World)』을 출간했다. / 존 퀸시 애덤스 : 미국 제6대 대통령(재임 1824~1828)으로, 1828년 재선에 실패한 뒤 죽을 때까지 20년 간 하원의원을 지냈다. / 앨저 히스 : 1904년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고, 존스홉킨스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9년 올리버 홈스(Oliver W. Holmes) 대법관의 법률 비서로 일하다 법무부에 들어갔고, 1933년 상원의 나이(Nye)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자신의 남동생 도널드 히스(Donald Hiss)와 함께 국무부에서 일했다. 1945년 2월에는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얄타회담을 준비하고 회담에도 참석했으나, 1946년 ‘스파이’ 누명을 쓰고 국무부를 떠났다. 이후 카네기재단 이사장이 됐지만, 1948년 ‘소련 간첩’으로 몰려 재판에 회부됐다. 대법원은 그에게 위증 혐의만 인정해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간첩죄는 공소시효 만료). 펜실베이니아주 연방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다 1954년 11월 모범수로 석방됐고, 1957년『여론의 법정에서(In the Court of Public Opinion)』를 출간했다. 10년 뒤인 1976년에는 히스를 옹호하는『앨저 히스, 그 진실(Alger Hiss, the True Story)』이, 다시 2년 뒤인 1978년에는 히스의 유죄를 주장하는『위증:히스 대 체임버스 사건(Perjury:The Hiss-Chambers Case)』이 출간됐다. 히스는 1996년 11월 9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에게 씌워진 간첩 혐의를 부인했다. 히스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는데 가장 열심이었던 인물이 부통령 리처드 닉슨(재임 1952~1960)이었고, 히스 사건은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빨갱이 몰이’의 광풍 속에 몰아넣는 매카시즘의 전조였다.

18

역자 주 : 뉴딜 정책은 1929년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 경제가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할 때인 1933년부터 1938년까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놓은 일련의 경기부양책을 말한다. 이때 재무장관에 기용된 애치슨이 ‘모건맨’ 등과 같은 경멸적 언사로 비난을 받은 것은 그가 미국 거대 자본가들의 이익을 불리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루즈벨트 사망(1945.4) 후 부통령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국무장관이 된 것은 ‘월가 자본의 세계시장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트루먼행정부가 출범한 뒤 미국의 대소 정책이 초강경 롤백전략으로 급선회한 것 역시 미국 자본가들의 세계시장 확보에 공산주의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었고, 한국전쟁은 이런 전쟁몰이가 가장 극단적 형태로 표출된 사례로 볼 수 있다.

19

역자 주 : ‘25년 전’은 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 주석 마오쩌둥과 만나 기 전을 의미한다. 1940년대 말 미국에서 ‘빨갱이 색출’에 앞장섰던 반공주의자 닉슨이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을 만나 ‘데탕트’ 운운한 것은 미국 정치인들의 실용주의적 세계관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웅변한 세계적 사건이었다.

20

역자 주 : 애치슨이 ‘총력외교’ 연설을 한 것은 1950년 3월 16일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열린 ‘국제경제개발을 위한 국제협력 회의’에서였다. ‘버클리 연설’이라고도 불린다. 스톤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급전환된 때를 1950년 2월이라고 밝힌 것은 그 한 달 전 ‘애치슨라인’ 연설(1950.1.12)을 시작으로, 두 달 뒤의 ‘총력외교’ 연설을 거쳐, 다시 한 달 뒤 미 국가안보위원회 보고 68호(NSC-68, 1950.4.14)를 통해 미국 외교정책이 롤백전략으로 선회하는 일련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거나, 총력 외교 연설을 하기 직전부터 그의 중국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는 말로 풀이된다. 애치슨은 ‘버클리 연설’에서 소련과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들로 인해 국제사회의 긴장이 완화되지 않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하면서 총력외교(total diplomacy)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소련 신문 가제트(Gazzete) 논평원 아나톨리 슈로프(Anatoli Surov)는 애치슨의 ‘총력외교’를 가리켜 “미국 거짓말쟁이의 총체적 히스테리(Total Histeria of an American Liar)”라고 비난했고, 또 다른 소련 신문<프라우다>는 애치슨의 총력외교 연설이 침략정책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침략정책에 봉사하는 애치슨의 소위 총력외교 -쁘라우다지 론평-」<노동신문> 1950.3.23). 애치슨의 ‘총력외교’ 연설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으로 미국과 한 편이었던 국민당의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 간 데 따른 ‘충격과 공포’와 무관하지 않으며, 두 달 전인 1950년 1월 12일 소위 ‘애치슨라인(Acheson Line)’ 발표 연설과 함께 한국 내전이 미국 및 서방 대 소.중.북 간의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애치슨은 총력외교 연설에서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베트민을 봉쇄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에 즉시 군사원조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원조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5월 초부터 시작됐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동남아시아 봉쇄’의 시작이라고 논평했다.(브루스 커밍스 책 <한국전쟁의 기원 -2> 92쪽) NSC-68은 1950년 4월 14일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작성한 58쪽 분량의 비밀 정책문서. 미국 외교정책은 공산주의 세력 확장 억제를 최우선시한다는 내용으로, 닉슨행정부의 대중 접근 전까지 20년 간 미국 외교 정책의 근간이 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9월 30일 NSC-68에 공식 서명했다.

21

역자 주 : ‘젤리화된 개솔린 폭탄’은 네이팜탄(Napalm bomb)을 의미한다. 미군이 2차대전 중 개발한 이 ‘유지(乳脂) 소이탄’은 주연소재인 나프타에 네이팜제로 불리는 증점제를 첨가해 젤리 형태로 만들어져, 최고 1300℃의 초고온 화염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불바다로 만든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그 피해가 극심했다.

22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열린 구술 역사 강연에서 전 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는 한국전쟁 초기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우리는 펜타곤 문 밑으로 쪽지를 슬쩍 넣어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저 위로 올라가서 ... 북한에서 가장 큰 도시 다섯 곳을 태워 없앱시다. 별로 크지도 않아요. 그러면 전쟁이 멈출 겁니다.” 돌아온 답은 네다섯 차례의 비명이었지요. “비전투원을 많이 죽이게 될 겁니다.” “너무 끔찍합니다.” 그런데 3년 남짓한 기간에 ... 우리는 북한과 남한의 모든 마을을 불태웠지요 ... 우리는 지난 3년 간 이런 일을 즐기면서 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몇 명을 죽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못 참아요.』

23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삶에 대한 역사의 효용과 단점에 관하여”, 『불시의 명상』(Untimely Meditations)』(R.J. 홀링데일 역,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 1983)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