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것은 기습이었는가?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의 발발은 기습으로 묘사되었다.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백서에서는 이를 '기습 공격'이라 표현했다. 유엔 한국위원회는 “첩보상으로 보아 침공이 임박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남한군은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전기 작가 존 귄터(John Gunther)는 “한국에 있던 한국군과 미군은 물론이고 도쿄에 있는 SCAP(맥아더 최고사령부)1조차도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고 썼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쟁 발발 당시 워싱턴의 첫 반응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공격은 일요일에 시작되었고, 이는 9년 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던 또 다른 일요일을 떠올리게 한다.2 유사점은 뚜렷했으나, 조사가 진행될수록 차이점도 드러났다. 한국 전쟁은 진주만과 달리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주만과 한국의 이러한 차이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으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고, 곧 잊혀졌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불편한 사실은 편리하게 잊어버린다.

워싱턴의 무더운 어느 여름날, 기자들이 미국 국방부 본부인 펜타곤을 방문했을 때, 한 보좌관이 비공식적으로 “미국은 이번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남한에 있는 미국 관료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선박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은 침략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기자들이 이 사실을 확인하려 하자, 미국 최고위 정보 책임자인 로스코 힐렌코터(Roscoe H. Hillenkoetter) 해군 중장을 만날 수 있었다.3 그는 모든 미국 정보기관에서 수집된 정보를 조정하고 배포하는 중앙정보국(CIA)의 국장이었다. 힐렌코터 제독4은 워싱턴의 관료들이 흔히 요구하는 “비공식적”이거나 “익명”의 조건 없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정보국은 이번 주 또는 다음 주에 침공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문인 뉴욕 타임스조차 이를 부차적인 내용으로 다루었다. 제독의 대답은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는 관료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둘러대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뉴욕 타임스는 다음 날 아침, 이번 전쟁 발발로 인해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정보 실패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힐렌코터 제독은 상원 세출 위원회의 비공개 청문회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다.5 그는 트루먼 행정부의 극동 정책에 대한 가장 맹렬한 비판자 중 한 명인 뉴햄프셔의 브리지스(Bridges) 상원의원의 발의에 의해서였다. 브리지스 상원의원과 함께 그 위원회에는 태평양 지역에서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던 또 다른 공화당 상원의원 노울랜드(Knowland)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울랜드 의원은 이미 “행정부가 완전히 허를 찔렸다”고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공화당은 진주만 공습을 주요 쟁점으로 삼았던 만큼, 한국 전쟁도 또 다른 정치적 무기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독은 오후 3시에 청문회에 출석할 예정이었지만, 백악관으로부터 더 긴급한 호출을 받아 청문회는 한 시간 후로 연기되었다. 제독에게는 고된 하루였을 것이다. 그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미국 정보기관이 부주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했고, 동시에 행정부가 왜 자신의 보고서를 근거해 사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피해가야 했다. 어쩌면 그는 대통령에게도 첩보 보고서에 왜 더 강력하게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백악관을 떠나면서 제독이 발표한 성명은, 대통령에게 설명했던 내용을 반영한 듯 보였다. 그는 “북한군은 이미 1년 전부터 남쪽을 침공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언제 침공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이는 그 전날 “이번 주나 다음 주 침공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던 그 전날의 발언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침공이 가능했지만, 실제로 일어날지는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곧 미국 정보국이 기습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는 여전히 이 버전을 고수했다. 존 귄터는 맥아더의 전기에서 이렇게 썼다. “6월 25일 아침, 북한군은 3개 경찰 지구대여단의 지원을 받아 적어도 4개 사단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약 7만 명이 투입되었고, 약 70대의 전차가 4개의 다른 지점에서 동시에 작전을 개시했다. … 어떤 군인에게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라. 이렇게 대규모 병력을 조직하고, 무장시키고, 넓은 전선 전반에 걸쳐 완벽하게 동기화된 가운데 정해진 날짜에 작전을 개시하도록 준비를 하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 그러나 도쿄에 있는 SCAP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 있는 남한 사람들과 미국인들은 모두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 … 그것은 진주만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눈을 감고 있었고, 심지어 우리의 발조차 자고 있었다.”

귄터는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조사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 바로 다음 날, 힐렌코터 제독은 상원 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상원의원들이 비공개 청문회장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진정된 상태였다. 제독은 위원회에서 전날 백악관을 떠날 때 했던 모호한 진술과는 달리 상당히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했다. 그는 정보 보고서 파일을 꺼내 보이며 미국이 전혀 기습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중 가장 최근의 자료는 전쟁 발발 5일 전인 6월 20일자였다. 브리지스 상원의원과 노울랜드 상원의원은 회의실 밖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에게 “CIA가 잘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국처럼 미국 정보기관이 군사적 징후를 쉽게 포착할 수 있는 곳에서, 그 일요일 아침에 38도선6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군사 준비가 감지되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한국은 미국 정보기관이 침투하기 어려운 나라가 아니었으며, 몇몇 불분명한 스파이의 빈약한 힌트에 의존하지 않았다. 당시 남한에는 500명의 미군 장교와 700명의 민간 기술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정부와 군 전반에 배치되어 있었다. 남한 정부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38선은 철의 장막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일한 언어를 쓰고 동일한 민족이 사는 지역이었으며, 국경의 대부분은 감시가 어려운 험준한 지역이었기에 오히려 침투가 쉬웠다. 이런 곳에서 대규모의 침공을 위한 군대가 배치되었는데도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날 제독이 상원의원들에게 보여준 보고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뉴욕 타임스의 군사 담당 논설위원인 핸슨 볼드윈은7 해당 정보가 “6월 초부터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따라 눈에 띄게 증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볼드윈은 “4개 북한 사단의 주요 병력과 2개의 경찰여단 규모의 부대가 국경선에 배치되었다”고 했으며, 이는 “간헐적인 교전과 국경 분쟁이 일상이던” 곳이었다고 전했다. 정보 보고서는 6월 초부터 “일본제 전차로 보이는 경전차와 중형 전차, 약 30문의 122mm 소련식 야포 및 기타 중화기가 전방에 집결되었으며, 병력 집중이 두드러지게 관찰되었다”고 썼다.

그렇다면 정말로 사전 경고가 있었다면, 왜 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발발 첫날 뉴욕 타임스는 국방부와 제독이 “기습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보도했을 때, 뉴욕 타임즈는 익명의 다른 “관찰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주장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보도했다. 이 "관찰자들"은 만약 미국이 국경에서 침공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유엔이나 북한 정부, 혹은 소련에 외교적 항의라도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정보를 언론에 흘리는 방식으로 비공식 경고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38선에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보도는 전혀 없었다.

이는 또한 힐렌코터의 청문회에서 상원의원들을 의문에 빠뜨렸다.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 제독은 “그가 제공한 정보의 의미를 수신 기관들이 왜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한 상원의원은 “내가 이 점을 반드시 파악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가 만약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개하진 않았다.

정보 보고서들을 통해 침공 준비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워싱턴이 놀랐던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힐렌코터 제독은 위원회에서 “자신의 기관 임무에 대한 그의 견해로는, 정보의 ‘평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정보는 두 달 후인 8월, 그가 CIA 국장직에서 교체되었다는 8월의 보도에서 밝혀졌다.

만약 이 정보를 평가하는 것이 힐렌코터 제독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런 정보에 대해 “이것은 침공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 국방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펜타곤은 서쪽의 독일 점령지부터 동쪽의 일본 점령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 책임을 지고 있는 곳이다. 만약 전쟁이 일본 코앞의 한국에서 발발해 태평양의 평화를 위협하게 된다면, 그 군사적 대응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의 몫이다.

맥아더 사령부가 이 정보를 중요하게 평가했다면, 워싱턴에도 경고가 전달됐을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가 이를 신뢰할 수 없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일축했다면, 워싱턴의 어떤 하급 관료도 그것이 전쟁을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워싱턴이 맥아더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맥아더는 결코 조용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익명 보도에서부터 대규모 공식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모든 홍보 수단을 총동원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점령지는 아니었지만, 포모사(대만)도 마찬가지였다.8 그런데도 몇 달 동안 공산주의의 포모사 공격 위협은 도쿄 사령부의 지속적인 화두였다. “38선에 전운이 감돈다”는 식의 헤드라인을 언론에 유도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확정된 전쟁 시간표가 없어도, 그 가능성만으로도 경고는 충분히 가능했다. 도쿄 사령부에서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하는 언론 보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맥아더의 성격과 평소의 홍보 방식으로 볼 때 오히려 더욱 수상한 일이다.

1

역자 주: SCAP(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로, 실질적으로는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미국이 일본 점령정책을 주도했다. 한국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었다.

2

역자 주: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도 같은 요일인 일요일에 발생하여 미국 언론과 정부는 이를 진주만과 비교하곤 했다.

3

역자 주: 힐렌코터는 CIA의 첫 번째 국장으로,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해군 제독 출신으로, 당시 CIA는 조직 초기였고 국가안보회의(NSC) 체제 하에서 정보 조율 기능을 막 시작하던 시기였다.

4

역자 주 : 힐렌코터가 CIA 국장이며 책의 내용에서도 그는 CIA 국장의 역할로 나오지만, 저자는 제독(Admira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CIA가 기밀 예산 사용과 독립적 권한을 부여받았던 것은 1949년에 중앙정보국법이 만들어진 후였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CIA의 해외 활동이 본격화되었음을 감안할 때, 저자는 당시 초창기 조직인 CIA의 국장이라는 직함보다는 (해군)제독이라는 표현이 좀 더 무게감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5

역자 주: 상원 세출위원회(Senate Appropriations Committee)는 연방정부 예산을 심의하는 미국 의회의 핵심 위원회로, CIA나 국방부의 예산과 활동에 대한 감독 권한도 있다. 냉전기에는 정보기관의 책임 추궁을 위한 주요 청문회를 열기도 했다.

6

역자 주: 38도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설정한 군사분계선이다. 한국전쟁이 이 선을 중심으로 발발함으로써, 상징적 경계선에서 실제 전선으로 전환되었다.

7

역자 주: 핸슨 볼드윈(Hanson W. Baldwin)은 뉴욕 타임스의 유명한 군사전문 기자이자 해설가로,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초기 미국의 군사전략을 보도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방부 내부 정보에 정통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8

역자 주: Formosa는 대만의 옛 지명으로, 1949년 중국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이곳으로 이전한 뒤 미국의 대중국 정책과 안보 전략에서 핵심 지역으로 부상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 중국의 침공 가능성이 제기되며 미군의 방어선으로 자주 언급되었다.